1953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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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3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는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용 제도를 채택하여 치러진 첫 번째 선거로, 1953년 9월 6일에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기독교민주연합(CDU)/기독교사회연합(CSU) 연합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2기 내각이 출범했다. 5% 봉쇄 조항의 전국 단위 확대 적용과 양당 체제 굳어짐에 따라 의석을 얻는 정당 수가 감소하며 서독 정치의 안정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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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 | |
---|---|
선거 개요 | |
선거 이름 | 1953년 서독 연방 의회 선거 |
국가 | 서독 |
선거 유형 | 의회 |
선거 시기 | 과거 |
이전 선거 | 1949년 서독 연방 의회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49년 |
차기 선거 | 1957년 서독 연방 의회 선거 |
차기 선거 연도 | 1957년 |
선출 의석 수 | 연방 의회(하원) 총 509석 |
과반 의석 수 | 244석 |
등록 유권자 수 | 33,120,940명 (6.1% 증가) |
투표율 | 86.0% (7.5%p 증가) |
선거일 | 1953년 9월 6일 |
선거 결과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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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 득표 결과 | 기민련/기사련 기민련 사민당 |
![]() | |
주요 후보 및 정당 | |
제1 정당 | 기민련/기사련 |
후보 | 콘라트 아데나워 |
이전 선거 득표율 | 31.0%, 139석 |
획득 의석 | 243석 (서베를린 비투표 대표 6명 포함) |
의석 변동 | 104석 증가 |
득표수 | 12,443,981표 |
득표율 | 45.2% |
득표율 변동 | 14.2%p 증가 |
제2 정당 | 사민당 |
후보 | 에리히 올렌하우어 |
이전 선거 득표율 | 29.2%, 131석 |
획득 의석 | 151석 (서베를린 비투표 대표 11명 포함) |
의석 변동 | 20석 증가 |
득표수 | 7,944,943표 |
득표율 | 28.8% |
득표율 변동 | 0.4%p 감소 |
제3 정당 | 자유민주당 |
후보 | 프란츠 블뤼허 |
이전 선거 득표율 | 11.9%, 52석 |
획득 의석 | 48석 (서베를린 비투표 대표 5명 포함) |
의석 변동 | 4석 감소 |
득표수 | 2,629,163표 |
득표율 | 9.5% |
득표율 변동 | 2.4%p 감소 |
제4 정당 | 전독일 블록/추방자 및 권리 박탈자 연맹 |
후보 | 발데마어 크라프트 |
이전 선거 득표율 | 신생 정당 |
획득 의석 | 27석 |
의석 변동 | 신생 정당 |
득표수 | 1,616,953표 |
득표율 | 5.9% |
득표율 변동 | 신생 정당 |
제5 정당 | 독일당 |
후보 | 하인리히 헬베게 |
이전 선거 득표율 | 4.0%, 17석 |
획득 의석 | 15석 |
의석 변동 | 2석 감소 |
득표수 | 896,128표 |
득표율 | 3.3% |
득표율 변동 | 0.7%p 감소 |
제6 정당 | 중앙당 |
후보 | 요하네스 브로크만 |
이전 선거 득표율 | 3.1%, 10석 |
획득 의석 | 3석 |
의석 변동 | 7석 감소 |
득표수 | 217,078표 |
득표율 | 0.8% |
득표율 변동 | 2.3%p 감소 |
정부 구성 | |
선거 전 정부 | 제1차 아데나워 내각 |
선거 전 정당 | 기민련/기사련–자유민주당–독일당 |
선거 후 정부 | 제2차 아데나워 내각 |
선거 후 정당 | 기민련/기사련–자유민주당–GB/BHE–독일당 |
2. 선거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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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선거 제도
1953년 선거부터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용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소선거구에서 후보자에게 직접 투표하는 제1투표(Erststimmen|에어슈트슈티멘de)와 정당 명부(주 단위로 작성)에 투표하는 제2투표(Zweitstimmen|츠바이트슈티멘de)의 2표제로 운영되었다. 전체 연방 의회 정수 484석 중 지역구 의석은 242석이었다.비례대표 의석 배분을 받기 위한 최소 득표율 조건인 5% 봉쇄 조항은 기존의 주 단위 적용에서 전국 단위 적용으로 강화되었다. 다만, 지역구에서 직접 당선된 의석은 봉쇄 조항과 관계없이 인정되었다(최소 1석 이상). 이는 소수 정당의 의회 진입을 어렵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지역구 의석과 정당 명부 의석의 비율은 이전 선거의 60%:40%에서 50%:50%로 변경되었다.
2. 2. 정당 및 후보
1953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 참여한 주요 정당들은 선거 포스터를 활용하여 적극적인 선거 운동을 펼쳤다. 당시 선거 운동에 사용된 일부 정당의 포스터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민주연합(CDU)
- 전독일국민당(GVP)
3. 선거 운동
콘라트 아데나워 CDU 대표 겸 연방 총리는 경제 재건 및 성장, 온건 보수주의 또는 기독교 민주주의, 그리고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며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사회민주당(SPD)을 강하게 비판했다. 아데나워와 그의 참모들은 선거 운동을 위해 과거 헤르만 괴링만이 사용했던 특별 제작된 안락한 객차와 언론인용 침대칸이 딸린 식당차를 이용하기도 했다.[2]
한편, 1952년 쿠르트 슈마허의 사망 이후 SPD의 새로운 대표가 된 에리히 올렌하우어는 슈마허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 노선을 취했다. 그는 원칙적으로 서유럽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이후 1957년에는 독일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는 군사 동맹을 지지하게 된다.[3][4]
선거 막바지인 9월 3일, 미국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아데나워의 패배는 독일 통일과 주권 회복의 전망에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독일 내 혼란을 야기하여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위한 노력이 불가피하게 지연될 것"이라고 발언하며 아데나워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2]
아데나워는 자신의 지도력과 임기 동안의 경제적, 정치적 성공을 내세워 서독 유권자 다수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분데스탁에서 과반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당(FDP) 및 보수 성향의 독일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4. 선거 결과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기민련(CDU)과 기사련(CSU) 연합은 경제 재건 성과와 중도 보수 노선을 바탕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기민련/기사련은 서베를린 대표 의석을 제외하고 연방의회 의석 과반수에 육박하는 243석을 확보하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는 1949년 선거 대비 108석이 증가한 결과이다.
제1야당인 사회민주당(SPD)은 득표율에서 큰 변화는 없었지만, 의석 확보에서는 기민련/기사련에 크게 뒤졌다. 자유민주당(FDP), 독일당(DP) 등도 의석을 확보했으며, 새로 원내에 진입한 전독일블록(GB/BHE)도 봉쇄조항을 넘어 의석을 얻었다.
선거 결과, 기민련/기사련, 자유민주당, 독일당, 전독일블록이 참여하는 아데나워 2기 내각이 출범하였다.
이번 선거부터 비례대표 의석 배분을 위한 5% 봉쇄조항이 주(州) 단위가 아닌 연방 전체 단위로 적용되었다(단, 지역구 1석 이상 확보 시 예외). 이로 인해 독일 공산당(KPD), 바이에른당(BP) 등 여러 군소정당들이 의석 확보에 실패했으며, 연방의회 진출 정당 수가 이전 선거에 비해 크게 줄었다. 이는 서독 정치가 기민련/기사련과 사민당 중심의 양대 정당 구도로 재편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4. 1. 투표율 및 정당별 득표율
총 유권자 수는 33,120,940명이었으며, 이 중 28,479,550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86.0%를 기록했다. 유효표는 27,551,272표(정당 명부 기준)였으며, 무효표는 928,278표였다.정당별 득표율 및 의석 수는 다음과 같다.
정당 | 득표수 (정당 명부) | 득표율 (%) | 총 의석 수 |
---|---|---|---|
기민련 (CDU) | 10,016,594 | 36.36 | 197 |
사민당 (SPD) | 7,944,943 | 28.84 | 162 |
자민당 (FDP) | 2,629,163 | 9.54 | 53 |
기사련 (CSU) | 2,427,387 | 8.81 | 52 |
전독일블록 (GB/BHE) | 1,616,953 | 5.87 | 27 |
독일당 (DP) | 896,128 | 3.25 | 15 |
공산당 (KPD) | 607,860 | 2.20 | 0 |
바이에른당 (BP) | 465,641 | 1.69 | 0 |
전독일 인민당 (GVP) | 318,475 | 1.16 | 0 |
독일 국가당 (DRP) | 295,739 | 1.07 | 0 |
중앙당 (DZP) | 217,078 | 0.79 | 3 |
국민연합 연합 (DNS) | 70,726 | 0.26 | 0 |
남슐레스비히 유권자연합 (SSW) | 44,585 | 0.16 | 0 |
합계 | 27,551,272 | 100.00 | 509¹ |
¹ 서베를린 대표 22석 포함 (기민련 6석, 사민당 11석, 자민당 5석). 이들은 연방의회에서 완전한 투표권은 없었다.
이 선거부터 비례대표 의석 배분을 위한 5% 봉쇄조항이 주 단위가 아닌 전국 단위로 적용되었다(단, 지역구에서 1석 이상 확보 시 예외). 이 조항의 영향으로 기민련/기사련, 사민당, 자민당, 전독일블록(GB/BHE), 독일당(DP), 중앙당(DZP) 등 6개 정당 그룹(기민련과 기사련을 별도로 셀 경우 7개 정당)만이 연방의회 의석을 확보하였다. 이는 1949년 선거에서 10개 이상의 정당이 의석을 확보했던 것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결과로, 거대 정당으로의 집중 현상을 보여준다.
4. 2. 주별 결과
의석(CDU)
(SPD)
(CSU)
(FDP)
(DP)
(DZP)